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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1
사마S
2025. 1. 7. 02:22
Written by 헤르츠
Call of Cthulhu 7th EditionFan-made Scenario
옳은 말은 거세되어선 안 된다.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살아서 이야기하는 거다. 그래야 다음 세대로 우리 말들이 전해질 수 있다.어떤 구전은 기록보다도 강력하다.
KPC 한양운 PC 강선중
2025.01.01
하늘을 걷는 길
.
.
.
열대의 달은, 한낱 인간 따위는 너무도 손쉽게 잡아먹으려 드는 것 같을 정도로 무거운 배를 부풀린 채 거친 눈을 뜨고 있다.
18살 9월,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첫 달이 지나갔다.
각성자들은 학교에 적응하고 제나름의 친분을 쌓아 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관학교라고 해도 결국 분류는 대학, 지식의 보고다.
바쁘게 뛰어가는 선배들, 과제 탓에 골몰하며 늦은 시간까지 도서실 불을 환히 밝히는 학생들, 느슨한 자유와 적당히 용인되는 비행.
저 장벽 너머에선 도무지 보기 어려운 녹음이 교정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세상이 다 이곳 같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날이 좋아 하늘까지 맑았다.
그것이 다 갖기 어려운 축복이라는 사실을, 카사블랑카의 시민들은 머리로나 알지 가슴으로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문득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반짝이며 알림을 울렸다.
홀로그램 패널이 온통 노란색이다.
늦지 말라고 성화다.
오늘은 1학년 학생들이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첫 가상 훈련이 있는 날이니 당연하다.
운동장 두 개 크기만큼 널찍한 홀로그램 단련실에서 특수 렌즈를 착용하면 바깥 사막과 동일한 환경을 구성해 둔 가상 VR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첫 한 달간 이론으로만 배운 전투를 어서 빨리 실전과 비슷한 공간에서 경험하고 싶다며 애가 닳은 학생도, 몹시 긴장하여 창백하게 질린 채 서 있는 학생도 있었다.
사실 학생들은 ‘자신과 맞는 구현자나 설계자가 누구일까’를 더 궁금해했다.
페어로 활동하는 각성자들은 70% 가량, 거기서 다시 15% 정도의 비율이 ‘각인’을 맺어 시너지를 내곤 한다.
페어를 자율적으로 정하라고 하면 보통 친한 친구끼리 무턱대고 함께했다 도리어 전투 방식이 맞지 않아 다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1학년 때에는 하늘길 시스템이 신체 데이터를 통해 서로 보조해줄 수 있겠다고 판단한 후보 학생들과 여러 번 짝을 바꾸어 가며 누가 자신과 알맞는지 테스트를 해 보는 것이 관례였다.
깐깐해 보이는 학생부회장이 명단을 읽었다.
각자 자신의 임시 페어를 찾느라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당신의 이름은 한참 기다린 후에야 불렸다.
멀리서 한양운이 다가온다.
훈련 순서가 다가올 때까지 두 사람이 잠시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하자.
앞선 순서 팀이 훈련실로 들어가고, 그들이 바라보는 가상 환경과 전투 광경이 부속실의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친구들을 응원하면서 손에 땀을 쥐는 스포츠처럼 중계를 관람한다.
가상 훈련인 만큼 부상을 입을 일은 없지만, 신체 부위마다 장착된 센서가 타격을 받으면 착용한 방어구가 고정되어 실제 부상처럼 움직임을 차단해 해당 부위를 사용할 수 없게 되므로 이 훈련 안에서는 진짜 다친 것이나 다름없다.
몇몇 팀은 훌륭한 성과를 냈으나 대부분은 기본적인 타격 범위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제한 시간을 초과했다.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모두가 처음이니까.
교수들도 채점 기준을 너그럽게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불쑥 뒤에서 말을 건 것은 학생회장 ‘유리 모하에’와 부회장 ‘요한 에를리히’.
3학년 생도들 중 우수한 학생들은 1학년 생도들의 멘토가 되어 졸업하기 전까지 2년간 상급생으로서 후배들을 이끌어 주는 제도가 있는데, 구현 A반과 설계 D반의 멘토가 바로 이 페어였다.
운이 좋다고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각 학년 수석 및 차석을 번갈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학기 첫 주에 유리가 구현자, 요한이 설계자라는 소개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대추야자를 집어먹고 있던 유리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요한은 혀를 차곤 안경을 밀어 올리며 스크린에 집중했다.
‘입학 체력평가 때 5등인가를 했다던’ 동급생이 화면 안에서 정확한 사격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능력이 총과 관련된 학생이었던 것이 얼핏 떠오른다.
곁에서 그의 페어가 소리를 지르는 게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좀 더 위로 경로를 끌어올릴 테니, 한 번에 쏘아 터뜨려! 마지막 한 방이다 생각하고 해치우자고!”
곧이어 설계자 쪽이 설계한 경로를 따라 미로를 뚫고 지나가듯 구현자의 총알이 궤적을 바꾸었다.
허공에서 몇 갈래로 갈라진 총알 파편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크리쳐형 로봇의 머리를 터뜨렸다.
지켜보던 동기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속 시원한 타격감을 따라 박수를 치던 유리가 당신과 한양운을 돌아보았다.
서로 잠시 눈이 마주친다.
짧은 대화를 나누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두 사람의 순서가 되었다.
보급받은 특수 렌즈와 방어구를 착용하자 몸이 다소 무거워졌다.
유리와 요한은 통신 인이어를 끼면서 조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주의사항을 몇 가지 더 들은 후에야 훈련실 입실이 재가되었다.
네 사람이 모두 입실하고 마침내 문이 닫히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는 모래바람이 불었다.
근래의 방독 마스크는 기능이 좋아 쓴 것 같지도 않게끔 호흡하게 해준다지만 이런 기후 속에서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인이어 안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한 차례 먼지 폭풍이 가셨을 때 비로소 풍경이 보였다.
‘재앙의 날’을 기점으로 인류가 유사 이래 이룩한 빛나는 문명은 전부 사토 속에 묻혔다.
첫 몇 년간은 식물들조차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해 말라 죽어갔던 고로 당대에 흔히들 ‘인류가 멸망하면 몇 년 안에 건물 벽면을 담쟁이덩굴이 뒤덮고, 동물들이 활개를 치며……’ 라고 상상하던 광경조차 제대로 전개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가동을 중단한 원자력 발전소가 비상 전력마저 잃고 인간이 직조한 가장 큰 멸망을 세상에 내보내려 했을 무렵에는 갓 개화한 각성자들이 그 위기를 막아 처음으로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사람을 징벌하려 드는 것 같은 함신,
인간의 오만을 꾸짖듯 흐려진 날씨,
찬란했던 문명에 바치는 추모비처럼 모래 속에 묻혀 쓸쓸히 늙어 가는 빌딩숲,
그리고 멀리 가장 거친 먹으로 그려낸 듯이 일렁이는 바다.
장엄한 자연의 비난을 처음 보는 1학년들은 말을 잃기 마련이다.
이 광경에 익숙한 멘토들이 앞장서 홀로그램 패널을 띄웠다.
강선중, 항법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1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요한이 올바른 경로가 표시되었는지 재차 체크했다.
이제 네 사람은 이 경로를 믿고 목적지까지 움직이면서 하나 이상의 크리쳐 로봇을 파괴해야 한다.
유리와 요한은 몇 가지 조언을 이어 갔다.
가장 먼저 강조된 것은 안전이었고, 그 다음으로 이어진 조언은 엄폐물과 환경을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낡아 가는 건축물들을 이용해 몸을 숨기고 접근했다가 설계자의 경로 구현에 에너지를 실어 구현자가 한 방을 터뜨리는 것이 기초적인 전투 방식이라고 했다.
넷은 가장 가까운 폐건물 옥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유리는 한양운에게 단추 정도 크기의 정찰 드론을 건네 준다.
한양운 핵심 기능 판정, 강선중 항법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4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90/45/18 |
굴림: | 3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그것은 몹시도 기이한 경험이었다.
전신의 감각이 단번에 확장되고,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공중에 투명하게 고여 있던 에너지가 희미한 붉은빛으로 일렁이며 물들고,
제멋대로 엉겼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던 에너지 흐름이 점차 정렬되어 미로 지도 같은 꼴을 이루었다.
방향은 서쪽으로 30m, 설계자는 에너지의 흐름을 가지런히 한 가닥으로 이어 뽑아 경로를 설정한다.
구현자가 그 경로 위에 제 힘을 실어 드론을 날려 보냈다.
미끄러지듯 경로를 타고 바깥을 떠가던 드론은 이내 적절한 길을 찾아 크리쳐 로봇에게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드론은 네 사람의 홀로그램 패널에 30m 너머의 크리쳐 로봇을 비춰 주었다.
미끌거리는 피부, 구역질나는 주둥이 속에서 긴 송곳니 두 개가 번쩍이는 크리쳐가 그르릉거리고 있었다.
몹시도 끔찍한 모습이다.
이성 판정
기준치: | 50/25/10 |
굴림: | 2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성 -1
잠시 침묵이 감돌고, 유리의 지휘 하에 KPC/PC 페어의 이능력 타입에 따라 2:1 전투를 전개한다.
폐건물에서 원거리 전투를 벌여도 좋고, 뛰어내려 근접전을 벌여도 좋다.
전투 순서는 강선중-한양운-크리쳐 로봇 순이다.
강선중, 설계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5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기준치: | 80/40/16 |
굴림: | 59, 2, 74 |
+2: | 극단적 성공 |
+1: | 극단적 성공 |
0: | 보통 성공 |
-1: | 보통 성공 |
-2: | 보통 성공 |
피해: | 4 |
강선중, 설계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7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한양운 핵심 기능 판정
기준치: | 90/45/18 |
굴림: | 99 |
판정결과: | 실패 |
피해: | 9 |
교육용 크리쳐 로봇 공격 판정
교육용 크리쳐 로봇:
기준치: | 70/35/14 |
굴림: | 8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피해: | 6 |
가슴 |
1
교육용 크리쳐 로봇이 한양운을 향해 송곳니를 꺼내 들었다.
한양운 회피 판정
기준치: | 60/30/12 |
굴림: | 70 |
판정결과: | 실패 |
강선중 설계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29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준치: | 80/40/16 |
굴림: | 3, 17, 39 |
+2: | 극단적 성공 |
+1: | 극단적 성공 |
0: | 극단적 성공 |
-1: | 어려운 성공 |
-2: | 어려운 성공 |
피해: | 4 |
강선중 설계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3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한양운 핵심 기능 판정
기준치: | 90/45/18 |
굴림: | 7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해: | 7 |
교육용 크리쳐 로봇 회피 판정
교육용 크리쳐 로봇:
기준치: | 30/15/6 |
굴림: | 2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교육용 크리쳐 로봇 공격 판정
교육용 크리쳐 로봇:
기준치: | 70/35/14 |
굴림: | 4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피해: | 3 |
가슴 |
1
가까이 다가온 로봇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다시 한양운에게 송곳니를 들이댄다.
한양운 회피 판정
기준치: | 60/30/12 |
굴림: | 77 |
판정결과: | 실패 |
강선중 설계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7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80/40/16 |
굴림: | 13, 36, 65 |
+2: | 극단적 성공 |
+1: | 극단적 성공 |
0: | 극단적 성공 |
-1: | 어려운 성공 |
-2: | 보통 성공 |
피해: | 5 |
강선중 설계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28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한양운 핵심 기능 판정
기준치: | 90/45/18 |
굴림: | 20, 46, 55 |
+2: | 어려운 성공 |
+1: | 어려운 성공 |
0: | 어려운 성공 |
-1: | 보통 성공 |
-2: | 보통 성공 |
피해: | 3 |
교육용 크리쳐 로봇 회피 판정
교육용 크리쳐 로봇:
기준치: | 30/15/6 |
굴림: | 81 |
판정결과: | 실패 |
사투 끝에 첫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유리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의 협력 수준이 아주 좋아 평균보다 빠르게 크리쳐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반파된 크리쳐를 바라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관찰력 or 지능 판정
기준치: | 80/40/16 |
굴림: | 3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저것은 어떤 길짐승도, 어떤 날짐승도 닮지 않았다.
……방사능 탓에 변이된 동식물이라기엔 조금 이상하지 않나?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념에 잠겨 있던 때, 동쪽 모래 폭풍 너머로 멀리 거대하게 솟은 첨탑이 어른거렸다.
관찰력 판정
기준치: | 80/40/16 |
굴림: | 6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부드러운 모랫빛 모스크다.
상단부에 발린 청록색 염료가 누렇게 바랬고, 아름다운 문양이 둘러쳐져 있다.
아랫부분의 아치형 석벽에 파도가 들이친다.
침묵 어린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유리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인데, 유리는 다른 것을 의식하는 모양이다.
곧 입을 꾹 다문 유리가 몸을 돌렸다.
언더독
.
.
.
첫 가상 훈련이 종료되고 학교는 잠시간 그 화제로 시끄러웠다.
저마다 제 임시 페어와의 동조율이 어땠는지, 자신이 크리쳐 로봇을 얼마나 멋지게 부수었는지 떠들어 댔다.
저런 흥분도 반복된 훈련을 거치고 나면 결국 사그라든다는 것을 아는 멘토들만 쓴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토요일, 학생들은 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누리고 있었다.
당신은 방금 잠에서 깬 참이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
그때 방문을 열고 동급생이 굴러들어오듯 뛰어 왔다.
헉헉거리던 그가 외쳤다.
“야, 너는 아니지?!”
갑작스레 들어와 ‘너는 아니지’ 하고 묻는다고 해도, 뭐가 아니냐는 말인가.
동급생은 답답하단 듯이 가슴을 쳤다.
“지금 인자 다 뒤집어졌어! 아직 안 봤어?!”
아무래도 서버에 접속해 봐야 할 것 같다.
당신이 스마트워치를 통해 인자미나에 접속하면 실시간 검색어 순위 상위권을 볼 수 있다.
1위 : 스와콥문트
2위 : 보츠와나
3위 : 모로코 장벽
4위 : 망명 정부
당신은 검색어 순위 키워드를 서치해 보거나, 동급생에게 이게 무슨 일인지 질문할 수 있다.
"여기 커뮤니티 좀 들어가서 봐봐!"
…그러니까, 글의 요지는 ‘정부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사실 스와콥문트에는 뭔가 조작된 구석이 있다’는 것 같다.
"너가 쓴 거 아니냐는 거였지. 반응 보니까 아닌 것 같은데?"
“나 새벽부터 잠 안와서 계속 새로고침 하고 있었는데 야, 글이 진짜 네 번을 올라왔다니까? 그러다 세 번째 글 삭제됐을 때 인자미나 서버가 잠깐 터졌거든? 그 뒤로 저 네번째 글이 오늘 동튼 직후에 올라왔는데 이상하게 저 글은 삭제가 안 돼. 코딩동아리 애들이 그러는데 사이트 자체를 해킹해서 글 작성한 아이디를 특수등급으로 빼둔 게 아니냐고 하더라고. 관리자 권한이 있어도 글 삭제가 안 되게.”
그러고선 주변 눈치를 본 동급생이 귀에 속삭였다.
“왜, 이런 반동분자 같은 글은 애초에 AI가 맥락을 검열해서 작성 자체가 안 되잖아. 글쓴 애도 시스템을 뚫을 줄 아는 녀석이 아니냐는 거지. 서버나 해킹, 계산 관련 이능력 가진 애들 아침부터 다 불려갔어.”
그제야 기숙사가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게 느껴진다.
다들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시민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딱히 근거는 없지만.
이런 상황에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겠으나 그렇다고 하루 종일 기숙사방에만 처박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가오는 중간고사도 있고, 과제도 있다.
당신은 성향에 따라 몇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이 사건과는 별개로 개인 일정에 신경을 써도 좋고, 게시글에 의문을 느껴 소문을 좀 더 수집하러 나갈 수도 있다.
"불려갔겠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근데 넌 새삼 태평하게 여태 자고 있었냐. 과제는 했어?"
"아니 미친! 야 우리 그거 오늘 자정까지야! 도서관에 자료 좀 있을텐데 가서 찾아봐라! 이 자식 이쪽이 급한 게 아니었네!"
"난 다 했지. 설마 안 하고 너한테 닥달할까. 아, 너랑 이번에 페어로 활동했던 형? 내가 구현자 반도 아닌데 어떻게 아냐. 너가 더 잘 알지 않아?"
"..."
동기는 할 말을 잃었다.
뭐... 어쨌든 도서관에서 과제용 책을 빌려학생회관의 자습실로 가면 될 것 같다.
(끙.....갑작스레 일어나서 어지러운 머리 이끌고 자습실로 향한다.)
(아차차, 그건 후순위지. 깜빡~. 자습실로 가던 길 도서관으로 옮긴다.)
아방하다.
고요한 도서관. 각성자사관학교의 도서관은 카사블랑카에서도 독보적으로 장서 수가 많아 유명하다.
다가온 중간고사 때문에 대부분 공부에 몰입해 있지만, 서가와 서가 사이에서 두 학생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니까, 몬로비아에서 시신 발견됐다는 거 구라 아니라니까. 아놀드 박사가 우리 사촌언니 담당교수였잖아.”
아무래도 아까 그 게시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책 너머로 흘끔 살피니 2학년 선배들이다.
대인기능or듣기 판정
기준치: | 80/40/16 |
굴림: | 2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획득할 수 있는 정보는 다음과 같다.
화학자였던 아놀드 박사는 새로운 물질을 발견해 낸 공로가 있어 스와콥문트 시민권을 획득했다.
이후 제자에게 본인의 연구자료를 전부 넘기고 조용한 은퇴 생활을 즐긴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SNS를 통해 요리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는 근황을 업데이트한 바 있다.
연구실 제자들 중 두어 사람은 아놀드 박사와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화상이나 음성통화도 이루어졌는데, 학생의 사촌언니 말로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고 한다. 연구제자와 아놀드 박사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 당연히 알아야 하는 주제에 대해 의례적인 답변이 돌아오거나, 연구주제에 관해 질문해도 정확한 대답을 내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화상 통화도, 음성 통화도 모두 조작이 가능한 시대다. AI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내는 게 뭐 그렇게 어렵겠는가?
학생회관 2층에 자습실이 있다.
자습실로 이동하자.
자습실로 들어서려던 당신은 복도 끝 학생회실에서 누군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듣는다.
……저 목소리는 아무래도 유리와 요한 같다.
말리는 쪽이 요한이다.
말마따나 다 들렸다.
뭣 때문에 저렇게 싸우는지 몰래 엿들어도 좋지만, 요한이 말린 탓에 간신히 크기를 줄인 유리의 목소리는 엿듣는다고 해도 잘 들리지 않는다.
바깥까지 다 들리니 무슨 일인진 몰라도 목소리를 낮추는 게 좋겠다는 경고를 하러 가는 것도 좋겠다.
두 사람이 싸우는 내용이 차라리 대놓고 들리면 모르겠는데, 가까이 가 보니 방음설계가 되어 있는지 대강 서로 탓하는 것만 얼핏 알 수 있고 정확한 내용은 도통 파악이 안 된다.
학생회실 문을 두드리는 당신, 갑작스레 학생회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유리를 마주하게 된다.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던 유리는 당신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성큼성큼 복도 저편으로 사라진다.
열린 문 안에서 한숨을 쉬던 요한은 잠시 후 학생회실을 나오고, 당신과 마주친다.
…다 들렸나?
..무슨 일 터졌어요?
당신의 대답이 끝나면 요한은 다시 ‘내가 늙는다’는 얼굴을 한 채 한숨을 푹 쉰다.
그런 후 당신에게 스마트워치 하나를 내밀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만, 이상한 점은 그게 아니다.
현대에 이르러 방수 기능까지 완벽해진 스마트워치는 정말 특이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풀지 않고 늘 착용하는 기기다.
어째서 스마트워치를 풀었단 말인가?
당신이 요한에게 이것을 질문해도 요한은 답변해 주지 않는다.
뒤뜰로 가 보자.
요한의 예상대로 유리는 학교 뒤뜰에 있었다.
정확히는 흡연 구역에.
대기오염 탓에 담배는 굉장히 규제가 심한 기호품이었다.
한 갑에 네 시간어치 시급을 털어 넣어야 하는 그것을 유일하게 좀 저렴히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각성자들이었다.
세상이 한 차례 멸망했어도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보급품은 담배와 초콜릿인 모양이다.
당신이 인기척을 낸다면, 유리는 깜짝 놀라 담배를 눌러 끄고 냄새를 탈탈 턴 후에야 멀찍이 서서 대화한다.
유리는 호쾌한 성격답지 않게 한참이나 숙고했다.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 ‘쉿’ 제스쳐를 취한 그는 손목의 스마트워치를 가리키고선 푸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무래도 시계를 풀라는 뜻인 것 같았다.
당신이 지시대로 시계를 풀자, 유리가 옆면의 S버튼을 묘한 박자에 맞추어 여러 번 눌렀다.
갑작스레 홀로그램 패널이 켜지더니 초록색 안내창을 내보냈다.
……음성 수집 기능?
그제야 유리가 입을 열었다.
상황이 가리키는 바는 분명하다.
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워치가 학생들의 대화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당신이 이 사실에 반응하면 유리는 여러 정보를 일러 준다.
나는 이 수집에 반대하지만 당장 학생회장으로서 이런 도청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이 없어.
네게 위험한 사실을 말해 주는 까닭은 아직 학교 규정을 잘 모르는 네가 혹여나 검열 기준에 어긋나는 대화에 끼어 큰일을 당하지 않을지 걱정이 되기 때문이야. 음성 수집 기능을 잠시 꺼 두는 건 그것대로 기록이 남지만, 이 기록은 내가 지울 수 있으니 몰래 지워 주려고 해. 앞으론 조심해.
……바보 같은 일일 수도 있지. 내가 이런 소리 했답시고 네가 당장 어디 날 고발할 수도 있고. 알아. 하지만 선중아,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이 ‘반동분자 같은’ 말 몇 마디 지껄였다고 학교에서 사라지는 것은 옳은 일이냐? 나는 오래 전에 이미 한 번 친구를 잃었고, 같은 일을 다시 겪고 싶진 않아서 학생회장이 됐어. 멘토 자리도 그래서 자원한 거고.
유리는 몸을 바르게 펴고 당신을 응시한다.
그의 이력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다.
어린 나이에 각성했고, 부모는 국가기관 연구소에서 일하는 ‘출신성분 확실한’ 가정의 외동딸.
별달리 억압당한 가족도, 잃어버리거나 빼앗긴 재산도 없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1학년부터 학생회에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 설파하기에 그의 삶은 다소 유복하다.
일견 기만으로도 보인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 더 말할 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유리는 고개를 내젓고 당신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준 후 자리를 떠났다.
감상은 당신의 몫이다.
과제...아직 하나도 안 했는데. (다시 자습실로 가? 아니면 그냥...버려야 하나?)
잠시 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양운이 오고 있다.
갑자기 두 사람의 스마트워치에 긴 진동이 느껴졌다.
서사의 판면을 강제로 집어 벌리고 삽입되는 개정 기호처럼 홀로그램 패널은 동의도 없이 방송 창을 띄웠다.
화면 너머에는 각성자사관학교의 학장이 무게감 있는 시선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사안이 중대해 전체방송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새벽 익명 커뮤니티 ‘인자미나’에 게시된 글의 작성 IP가 교내인 것으로 추적되었습니다.
교수진은 불온한 선동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가 우리 학생 혹은 교원의 손에서 빚어졌다는 사실에 지극한 유감을 표합니다.
학생 여러분께선 헛된 소문에 경도되지 말고 우리 빛나는 오십 년 사학을 지킬 수 있도록 학업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각성자사관학교는 당 사안을 좌시하지 않고 엄중히…….
정말 헛된 소문이라면 이렇게 대응하는 것보다야 무시하는 것이 일을 덜 키우는 방식이리라.
행간에서 윗선의 압력이 있었음을 읽을 수 있는 연설이었다.
지리한 말들이 이어진 후 학장은 벌떡 일어서 허공을 응시했다.
화면에는 이제 학장의 얼굴 대신 아프리카 연합공화국의 국기가 송출되고 있었다.
발자국 거친 사막으로부터 인간의 도약 다시 시작되리
조국은 참되어 거짓을 모르니 아프리카여, 영혼의 요람 되어 새 외침을 빚으라
신은 어떤 침략보다도 위로부터 굽어보신다
물수리 나는 창공과 천 년의 녹음 우거진 여름 돌아올 때까지
마땅히 이 자리에서 각자의 구원을 위해 힘쓰겠노라
삶과 죽음은 한 선으로 가로놓여 있어, 동일한 권리 나누어 받은 시민들이여
여기 화합과 희망의 상징, 위대한 화음이 있으니
이 땅의 더 나은 미래를 우리 자녀들에게로 넘기자
국가 <신이여, 아프리카를 굽어보소서>가 작사될 때에 이슬람 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이 조사 하나까지 좀 더 서로의 종교에 알맞은 색깔을 담으려 다투는 광경을 보고,
유럽과 아시아의 ‘선진국’에서 건너온 초기 공화국 시민들은 퍽 당황했다고들 한다.
그들이 생각하기로 아무튼 아프리카의 종교라고 하면 젬베를 두드리며 토착신을 찾는 종류였지 지극히 ‘문명화된’ 메이저 종교를 믿을 리는 없었으니까.
이 무례하고 순진한 오해를 지닌 산부의 산도를 열고 새로운 공화국이 마침내 세상에 머리를 들이밀었을 때 정부는 좀 예민하다 싶을 만큼 ‘화합’을 강조했다.
출신도 문화도 다른 사람들이 재난 때문에 섞여 살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교정에, 회사에, 길거리에, 카페에, 펍에 국가가 울려퍼질 때, 우리는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어디에나 설치된 공화국 국기를 향해 경례해야 한다.
나라 어디서나 국기는 휘날리고, 그것조차 여의치 않을 땐 하늘길 시계가 국가를 자동 인식하여 홀로그램 패널로 국기 이미지를 띄워 준다.
검은 상단은 여러 국가를 뿌리로 둔 시민들이 화합되어야 할 아프리카 연합공화국의 대표색상 역시 모든 색을 섞은 검은색이라는 의미이고,
흰 하단은 이 땅이 흐트러지기 전부터 오래 자리를 지켜 온 아프리카 대륙의 사막을 오염 이전으로 돌려놓겠다는 의지를 상징한다.
가운데 노란 원이 태양을, 태양 안의 붉은 별 일곱 개가 일곱 도시를 나타낸다.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어린이들은 국부로 추숭되는 초대 대통령의 위인전을 읽으며 자라나고, ‘모든 사람은 동일한 권리를 타고난다’고 교육받으며,
험지를 헤치고 인간의 위대한 문명을 다시 이룩한 조국에 충성을 바치라는 가르침을 듣는다.
학교는 고요하여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적은 돈으로 빈 방을 모두 채우라는 요구에 초를 사와 불을 밝혔다던 처녀의 일화처럼 이 광막한 공간에는 오로지 경건하고 엄숙한 국가 선율만이 가득했다.
한양운은, , 경례하지 않고 있었다.
불가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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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널리 드나들 수 있도록 지은 1층 회랑은 카사블랑카의 자부심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제 그런 통기성 좋은 건물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진 시대였기 때문이다.
때로 함신은 굳건한 도시 장벽 너머로부터 날아와 외벽을 덮어 버리곤 했다.
그러나 비공식적 별명으로 ‘제1도시’ 라는 명칭을 가진 카사블랑카의 장벽만은, 공화국 시민들을 불편케 하는 모든 재난으로부터 사람을 지킨다.
언제나 굳건하게.
따사로운 햇살과 축복 같은 적도편동풍이 뺨을 어루만지든 어쩌든, 학생들에게는 불행했던 중간고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 1층 회랑을 지나 2층에 도서관이 있다.
이제 시험은 두 개가 남았다.
<군사전략 입문>, <전략문화와 전쟁>이었다.
<전략문화와 전쟁> 중간고사 시험 대체 조별 과제 에세이는 첫 가상 훈련 때 맺어졌던 페어끼리 함께 작성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과제의 주제는 이랬다.
「리델하트의 『전략론』을 통해 독일이 독소전쟁에서 패배한 사유를 분석하라.」
…1학년이 당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본래 <전략문화와 전쟁> 강의 평가는 늘 심한 호불호 영역에 놓여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머리를 너무 쥐어뜯은 탓에 그걸 다 치워야 하는 근로장학생들의 스트레스도 갈수록 쌓여 갔다.
당신과 한양운은 도서관 구석 창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여러 자료를 읽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긴긴 고난 끝에 레포트는 결론 부분에 다다랐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근처 자리에서 골머리를 썩던 동급생이 다가와 한양운에게 말을 건다.
"형, 30분 남았어. 우리 슬슬 준비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남은 시험 중 다른 강의인 <군사전략 입문> 가상 훈련에서 한양운과 또다른 임시 페어를 맺고 있는 노노이 라가힛이었다.
한양운은 인사를 나누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뒤에서 유리가 나타난다.
유리는 근처 서가에서 책을 한 권 뽑아 오더니 한양운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후르륵 몇 장을 넘겨 문단 하나를 가리킨다.
…전쟁이란 냉병기를 쥔 영웅들이 대강 ‘와아아’ 하고 몰려왔다가 단신으로는 보일 수 없는 무위로 세상을 휩쓸어 ‘그리하여 여기서 역사의 지도는 변곡점을 맞았다’ 따위로 묘사되는 일이 아니다.
레마르크의 ‘이 책은 고발도 아니고 또 고백도 아니다.
비록 포탄은 피했다 할지라도 역시 전쟁에 의해서 파괴된 어느 시대를 보고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문장이 저 사막의 신체를 입은 재앙 속에서도 온전히 남아 우리 세대로 전해진 사실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전략문화와 전쟁> 담당교수가 집필한 도서가 분명했다.
그 교수는 특유의 유려한 어조로 전쟁의 비극과 날것 같은 참호전의 참상을 묘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대화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도서관 내 정숙이라는 예절도 신경 쓰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누군지 보기도 전에 당신은 팔을 잡아채여 일으켜 세워졌다.
"강선중! 너 가상훈련 때 한양운이랑 임시 페어 맺었던 애 맞지. 빨리 와! 설계 반동 터졌어!”
유리가 몸을 튕기듯 일어났다.
의무실 바깥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상황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밀색 에너지가 문 밖까지 일렁이고 있었다.
그 위로 검붉은색 에너지가 얹혀 피처럼 뚝뚝 흘렀다.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
의료진 두 사람이 발작하는 한양운을 억누르고 약을 주사하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를 지경이고, 식은땀이 침대보를 적시고 있었다.
한양운은 괴로운 듯이 가슴을 움켜잡고 있다.
유리가 침대 곁으로 달려가 의료진까지 제치고 화면에 표시되는 에너지 파동을 읽었다.
낭패라는 듯이 그가 외쳤다.
"반동이 너무 심하게…… 같이 시험 치르던 학생이 심하게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한양운의 페어는 노노이 라가힛, ‘입학 시험 때 5등인가 했다던’ 그 동기.
이를 악문 유리의 시선이 허공에 머물렀다.
정확히는 정체 모를 검붉은색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서.
그가 당신을 휙 돌아보았다.
"아니, 유리 학생. 설계 반동이 위험하긴 해도 죽는 정도까지는……."
무슨 확신이라도 있는지 고함을 지른 유리가 올올히 일어서 불타는 눈으로 당신을 쏘아보았다.
유리는 쏘아보듯 당신을 바라본다.
상황이 급박한 것 같다.
당신이 정식 페어를 맺는 것에 동의한다면, 유리가 의료진을 이끌고 의무실 바깥으로 나간다.
‘페어 언약’ 절차시엔 근처에 다른 각성자가 있어서는 안 됐다.
에너지가 엉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양운은 몹시 괴로워하지만 의식은 있다.
한양운을 달래거나 독려하여 안정시키고 페어 언약을 시도하게끔 한다.
강선중 항법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5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한양운 핵심 기능 판정
기준치: | 90/45/18 |
굴림: | 7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간난신고 끝에 뜨겁고 전류 같은 에너지가 심장까지 메다 꽂혔다.
일견 자해와 비슷하다는 기분이 들 만큼 무자비한 방식의 지배였다.
심장을 움켜쥐는 에너지의 흐름, 온전히 열어젖힌 정서, 경로, 녹은 금속처럼 무섭도록 달아오르는 두 사람의 체온,
세상을 묘사한 페이지가 불타 부스러지고 판정과 글줄로 이루어진 우주에 오로지 둘만이 온전한 것처럼.
잠시 후, 자연스레 피어오른 에너지가 올드 로즈색 빛을 뿌리며 허공을 맴돌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인해 생리적 눈물이 맺힌 한양운의 시선이 당신을 본다.
정신을 차린 것 같다.
에너지 유량이 크게 늘어났다.
이전까지 되지 않던 것이 지금 이 순간부터는 수월하게 가능할 것 같다.
몹시도 기이한 기분이었다.
한양운이 아주 멀어지더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감각.
언젠가 아주 떠나 버릴 것을 예고하듯이.
열병에 들뜬 사람처럼 한양운은 힘겹게 숨을 쉬고 있다.
큰 추위에 시달리는 듯했다.
에너지 유량은 급속도로 늘어났는데, 반동으로 인해 고갈된 에너지가 도로 채워 지질 않으니 추위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안정시키는 방법은 사람의 체온, 그리고 접촉으로 건네주는 에너지 주입 뿐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안다.
너테파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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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모하메드 알 한살리 거리를 따라 바다 쪽으로 10여분 걸으면 대형 선박들이 정박한 카사블랑카 항구가 나타난다.
유럽 국가들과의 거의 유일한 교역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오전부터 카사블랑카 항구에서 짐을 잔뜩 실은 트럭 여러 대가 각성자사관학교로 들어왔다.
새 나라가 만들어졌다고 한들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새 벽돌을 올릴 까닭은 없었으므로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도시들은 저마다 기존 건축 양식을 아직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모로코의 상징은 흰 벽에 녹색 지붕을 이은 호화롭고 장대한 건물들.
아라베스크 문양이 조각된 나무판이 벽면을 둘러싸고, 안뜰은 대리석으로 꾸민다.
젤리즈 타일이 섬세하게 벽을 장식했고, 세밀한 조각과 촘촘한 문양은 사람을 황홀케 했다.
종교 건축물처럼 웅장한 파사드를 지나 여러 개의 건물을 거쳐 이르는 중앙 정원은 안달루시아풍이다.
오늘은 각성자사관학교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베로니카 주간’ 둘째날이다.
본래 카사블랑카에는 없었던 명절이고, 다른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래한 것도 아닌 절일이지만 학생들은 베로니카 주간을 좋아했다.
초대 학장이 어릴 적 동생의 생일이 되면 가정에서 하던 놀이를 시험 삼아 내놓았던 게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어 이제는 아예 축제 주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학생들은 이미 손에 맥주 한 잔씩을 든 채 동아리들이 준비한 행사에 참여하거나 미로 찾기 놀이에 끼는 등 즐거워하고 있었다.
당신도 출발할 때가 되었다.
1학년들은 메인 게임에 참여해야 했으니까.
두 사람이 짝을 이뤄 한 조씩.
그러니까 지금 기숙사 밑에는 한양운이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은 함께 정원으로 향한다.
이 계절이면 흐벅지게 피어 투명하게 빛이 나는 너테파도꽃이 너른 정원과 온실에 가득했다.
얼음이 켜켜이 쌓인 것처럼 꽃잎이 겹을 이루어서 너테, 수십 송이가 바람을 받아 차르르 흔들리면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아서 파도.
해파리 같은 암술이 보석처럼 푸른 빛을 내고, 반투명한 꽃잎은 그 빛을 그대로 반사하여 시인이 다음 천 년간 내내 노래해도 부족할 것처럼 아름다웠다.
2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면 더욱 장관이었다.
야자수 아래의 흰 벽돌과 로코코식 낮은 울타리 안에 피어나 깨질 듯이 반짝이는 꽃들.
군데군데 켜 놓은 조명이 부드럽게 퍼지면서 만드는 야경, 속살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 낭만적이고도 뜨거운 열대의 밤.
축제 둘째 날, 이 밤에는 베로니카 주간의 핵심적인 행사인 ‘너테파도꽃 찾기’가 열린다.
종종 피어나는 돌연변이를 아예 품종으로 만든 은색 너테파도꽃이 있는데, 이 은색 꽃을 푸른 꽃들 사이에 단 서른 송이만 숨겨 놓는다.
학급마다 정원을 돌며 은색 꽃을 가장 많이 찾아낸 사람이 상품을 받는 놀이였다.
두 사람이 짝을 짓는데, 이번에도 한양운과 당신은 한 팀이 되었다.
설계 반동이라는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1학년인 주제에 벌써부터 정식 페어가 되었다는 것이 소문 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꽤 이목을 끄는 한 쌍이었다.
강선중 관찰 판정
기준치: | 80/40/16 |
굴림: | 6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강선중 행운 판정
기준치: | 50/25/10 |
굴림: | 89 |
판정결과: | 실패 |
(.........)
당신은 무언가 발견했다.
잔디 쪽에서 무언가 은색 빛을 내며 빛나는 것이 혹시...?
앗.
누군가 통조림을 먹고 버려둔 것 같다.
텅 빈 은색 통조림 (쓰레기)를 발견했다.
가지실래요?
한양운 관찰 판정
기준치: | 80/40/16 |
굴림: | 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한양운 행운 판정
기준치: | 50/25/10 |
굴림: | 78 |
판정결과: | 실패 |
한양운도 뭔가 반짝이는 걸 발견한 모양이다.
어라... 저건 은색 꽃...?
가까이 다가가 보니 너테파도꽃인 줄 알았더니, 그 짭으로 시장에서 자주 팔리는 너드파괴꽃이였다.
저런...
강선중 관찰 판정
기준치: | 80/40/16 |
굴림: | 4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강선중 행운 판정
기준치: | 50/25/10 |
굴림: | 4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아니, 저 빛은...!
저거야 말로 진짜 너테파도꽃 같다!
들었던 외향 설명이랑 완벽하게 딱 맞는 비주얼이다.
강선중 행운 판정
기준치: | 50/25/10 |
굴림: | 75 |
판정결과: | 실패 |
너테파도꽃 찾기는 순위권 바깥의 결과가 나왔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닭은 시장 가는 것을 거절할 수 없고, 죽은 독수리의 날개깃은 흩어지기 마련
.
.
.
베로니카 주간의 셋째 날. 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던 학생들이 오전나절 내내 침대 위나 뒹굴며 쉬고 있었기에 학내는 고요했다.
“----!”
평화를 깬 것은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몇 학생이 그 방향으로 뛰쳐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떻게 할까?
“라가힛!”
“누가 응급콜해! 빨리!”
쓰러져 발작하며 피를 토하는 학생을 둘러싸고 주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 틈을 뚫고 군홧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2주 전 들이닥쳐 아직도 ‘불온 게시글’ 사건을 수사 중인 헌병대원들이었다.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헌병대 예장에는 기묘한 모자-가면-투구가 포함되어 있다.
서아프리카 도곤족의 전통을 따른 사팀베 마스크가 그것이다.
디자인 자체는 서아프리카 전통에서 따온 것이니 이상하다고 할 게 없지만, 가면을 쓴 헌병대가 붉은 줄과 구슬을 관자놀이에 드리우고 표정을 감춘 채 사람들을 내려다보면 아무래도 조금 두렵기 마련이다.
죽음의 사자가 내려다보는 광경 속인 것처럼, 노노이 라가힛은 바닥을 긁으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손톱이 깨지고 피를 토하는 소년의 몸 위에서 검붉은 에너지가 마치 자아를 가진 듯이 움직이며 그를 감싸 죄었다.
라가힛의 꼴을 보고 놀란 요한이 달려와 몸을 구부렸다.
엎드려 울부짖는 소년을 껴안아 달래고, 뒤집어 똑바로 눕히고, 눈에 품은 렌즈로 아주 오랜 노출을 주어 사진을 찍듯이 그 광경을 들여다본다.
부르지 않아도 소란을 듣고 이미 한양운은 군중이 둥그렇게 모여 선 한중간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가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모여 있던 학생들은, 사람이 터지면 그런 소리가 난다는 것을 강제로 알게 되었다.
안에서부터 폭탄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노노이 라가힛은 말 그대로 터졌다.
공중에 살점과 피가 흩날리는 광경을 굳이 무참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겠다.
곁에 서 있던 요한과 한양운은 피를 흠뻑 뒤집어썼다.
이성 판정
기준치: | 49/24/9 |
굴림: | 3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성-1
너무도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순간이라 비명은 뒤늦게 산발적으로 커졌다.
비틀거리며 도망치거나 주저앉아 구토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헌병대 한 사람이 노노이 라가힛의 가장 큰 부분을 집어들었다.
도곤족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들이 가면을 자아 표현과 제식 수단으로 썼지만,
장례식에서 쓰는 가면은 오로지 사팀베 마스크 하나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저 표정 없는 얼굴은 더욱 두렵다.
어떤 사회문화 연구자들은 이 예장을 두고 인류의 기원 이후 아주 오랜만에 사람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가질 수 있었던 아프리카인들이
‘문명국’에서 넘어온 ‘비흑인’들을 ‘비문명적’ 방식으로 위압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아니었나 논설한 적이 있다.
억압받지 않던 자가 억압받던 자들의 방식을 야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 야만이 될까?
어떤 역사의 신성한 전통을 압제에 사용하는 것은 야만이 아닐까?
이제는 토론할 수 없다.
그 연구자들은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고, 이 아프리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부터 그러하였듯 기록보다는 구전이어서, 말할 입이 없어진 목소리는 이내 사그라들었다.
오래 내려앉은 그 침묵을 사르고 타는 불꽃처럼, 요한이 고함을 지르며 라가힛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자 라가힛을 집어들던 헌병대원이 빈 손으로 가면을 밀어 벗었다.
안에서 드러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인상이 참 좋은 청년이라고 평가했을 법한 남자의 얼굴이다.
관찰력or지능 판정
기준치: | 80/40/16 |
굴림: | 26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당신은 그 청년과 요한 에를리히가 퍽 닮았다는 느낌을 받고, 사관생도가 헌병대원에게 함부로 반말을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두 사람은 무슨 관계일까?
남자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다.
"노노이 라가힛의 신병은 헌병대에서 인수하겠다. 손을 놓기를 권유한다, 요한 에를리히."
그러자 남자는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라가힛의 가장 큰 부분’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한쪽 무릎을 굽혀 (자신과 닮은) 얼굴을 바라본다.
"사관생도 노노이 라가힛에게는 즉결 처분 가능한 혐의의 증거가 있다."
"그가 불법적인 약물을 도핑해 그 부작용으로 발작을 일으켰다는 증언이 접수되어 수사한 결과 여러 혐의를 확보했다."
"이 폭사(爆死) 역시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으니 부검이 필요하겠군. "
"수사가 종료된 후에는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하여 유해를 화장하겠다. "
"불만 있나, 요한 에를리히? 그렇다면 정식으로 소를 제기하는 건 어떤가."
이제 공화국 시민들은 다양한 옛 지역에서 유래된 속담을 다 섞어 쓴다.
‘닭은 시장 가는 것을 거절할 수 없다’는 말은 중부 아프리카에서 올라온 관용어구였다.
약자는 강자를 거부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성적으로 구는 요한답지 않게 점점 격앙되고 있다.
헌병대에게 이런 식으로 반항하다간 징계 감이다.
어떻게 할까?
요한을 말린다면 씨근덕대면서도 서서히 시신에서 손을 뗀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노노이 라가힛의 시신은 결국 헌병대가 회수해 갔다.
오후 일정과 행사는 모조리 취소되었다.
학생들에게는 기숙사로 돌아가 경거망동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는 식의 공지가 내려왔다.
그나마 기숙사 안에서는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으므로 친구들의 방과 방을 건너다니며 몰래 저들만의 추측을 속삭이고 있는 듯싶었다.
그날 밤 유리 모하에가 죽었다.
스푸트니크의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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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믿을 수 없는 소문은 학생회로 처음 전해져서, 기숙사 휴게실을 몇 개 거쳐 교정 전체로 퍼졌다.
독재에도 등급이 있다.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지독하리만치 세련된 통치 방식은 사람들을 자기 주도적으로 감화시켰다.
우리는 문명인이야.
한번 스러진 인류를 복구해 빛나는 새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어.
나라가 잘 하고 있으니 박수를 치는 것은 시민의 지지이지 신민의 굴종이 아니야.
사람들은 공화국 정부가 정상적인 정책을 펼치지 않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게 몇십 년이다.
전시도 아닌 교내에서 헌병대원의 손에 학생회장이 죽었다고 한다.
이 문명적인 나라에서 실로 있을 수 없는 일이 터졌다.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한 잔인한 억압을 보면 일단 공포에 질려 입을 닫는 법이다.
하지만, 왜?
그리고 정말로?
시작은 당신의 방이다.
당신은 기숙사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정보 없이 가만히 숨어 있어서는 무슨 일에 휘말릴지 모른다.
학생들이 많이 가는 장소를 떠올려 보니 기숙사 1층 학생식당이나 2층 휴게실 정도가 생각난다.
학생식당부터 가볼 수 있도록 한다.
학생식당에는 헌병대원 두 사람이 경계를 서고 있다.
들어 보니 공식적인 사유는 어제 라가힛의 사건 탓에 교내에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단속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감시가 있는 탓인지 학생식당은 영 조용하다.
학생들 몇몇이 눈치를 보며 식사를 하고, 주방 직원들도 친근하던 평소와 달리 좀처럼 말을 걸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때 직원 한 사람이 당신을 부른다.
들리지 않도록 조그맣게 속삭인다.
“학생, 요한 군이랑 그 멘토인가 그거지? 요한 군이 어제부터 통 안 보이는데, 큰일이네……. 괜찮으면 이것 좀 전해줄 수 있겠어요?”
라면서 직원이 건넨 것은 웬 달걀 두 개와 음료수였다.
받아들었을 경우 달걀이 묘하게 가볍고 안에서 달각달각 소리가 난다.
그때, 그 광경을 유심히 보고 있는 학생 하나가 눈에 띈다.
1학년 명찰을 달고는 있는데 영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는 멀찍이 선 헌병대원들의 눈치를 보더니 식판을 돌려놓는 척 다가와 속삭였다.
“앙셰네 지 수습기자예요. 우리 빨대가… 아니, 미안해요. 그러니까 우리 취재원이, 학교에서 어제 큰일이 있었다고 하길래 내용을 알고 싶어서 몰래 들어왔어요. 뭐 얘기해줄 거 없나요?”
앙셰네 지라면 풍자와 비판으로 유명한 대형언론사다.
그는 손에 명함 하나를 쥐여 주고 멀어졌다.
"…그렇군요. 혹시 나중에라도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 줘요. 부탁이에요.”
주변 학생들에게 요한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잘 모른다는 반응이지만, ‘아까 2층에서 본 것 같다’는 말을 해 주는 선배가 하나 있다.
이상하게 식당을 제외하면 기숙사엔 헌병대원이 전혀 없었다.
헌병대 수색이 학교와 전부 다 협의되지 않기라도 한 걸까?
조용한 복도를 지나 휴게실로 향한다.
휴게실 문 앞에서 한양운과 마주쳤다.
휴게실은 각층마다 2개씩은 있고, 퍽 넓어서 작은 도서관처럼 여러 학생들이 쓸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지만 오늘은 인구밀도가 심하게 높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수십 개의 눈동자가 화들짝 놀라거나 경계하는 시선으로 돌아보다가, 같은 학생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안도한다.
학생 몇이 다가와 당신에게 말을 건다.
“얘기 듣고 온 거야, 아니면 그냥 들른 거야?”
“…모르고 왔구나. 우리, 그 소문이 맞는지 확인 좀 해보려고 모였어. 진짜라면 학교를 다 뒤집어야 할 사안이잖아. 유리 선배 얘기 말이야.”
다들 밤을 샜는지 눈이 벌겠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 엎드려 자고 있는 학생들, 어디론가 연락을 잔뜩 돌리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요한이 앉아 있다.
그는 태블릿 디바이스를 조작하고 있었는데, 요즘엔 잘 쓰이지 않는 물리 키보드까지 두드리는 중이었다.
요한도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았는지 얼굴 상태가 영 아니었다.
당신이 달걀과 음료수를 건네줄 경우, 요한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그것을 받는다.
부활절도 아닌데 귀여운 그림이 그려진 그 달걀에는 ‘성심성당’ 이라는 손글씨가 쓰여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요한은 달걀 껍질을 깨트린다.
안에서 나타난 건 삶은 달걀 흰자가 아니라 빈 내부였다.
손톱만한 메모리 카드가 툭 떨어진다.
요한의 능력은 해킹.
에너지를 섬세하게 다루어 서버 간 데이터 전자 신호에 간섭하는 용도로 활용하곤 한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거기에 두 사람의 도움이 왜 필요할까?
... 하지만 강선중, 한양운, 이 일을 돕는다는 건 너희도 이 학교나 정부 지침에 반기를 드는 동조자가 된다는 뜻이다. 나는 유리와 관련된 진실을 파헤쳐야 할 필요가 있고, 여기 모인 애들도 그 목표에 공감하는 사람들이지만, 너희 생각이 어떨지는 몰라.
괜찮겠어?
강선중 항법 판정
기준치: | 75/37/15 |
굴림: | 6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한양운 핵심 기능 판정
기준치: | 90/45/18 |
굴림: | 18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요한은 두 사람의 에너지가 넘실거리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명령어를 입력하고, 엔터를 친 후 옆 사람을 돌아본다.
“……돼! 잠깐만, 성당으로 전화 걸어 볼게.”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학생들은 단계별로 차단이 해제되었는지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요한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홀로그램 패널을 위로 끌어올려 크게 키웠다.
화면이 여러 개로 분할되며 다양한 각도의 CCTV를 재생하기 시작했다.
새벽 시간대를 계속해서 돌려 보며 유리를 찾아내고 있는데, 쉽지 않아 보인다.
강선중 자료조사 판정
기준치: | 80/40/16 |
굴림: | 95 |
판정결과: | 실패 |
CCTV 영상이 너무 많아 어지럽다.
근처 선배가 정보를 대신 발견한다.
화면 구석 ‘16번 카메라’에서 헌병대원 네 사람이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을 어깨에 둘러메고 기숙사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을 발견한다.
시각은 오늘 새벽 1시 24분.
“저기 멈춰 봐! 1시 24분경. 그래, 맞네! 사람 들고 가잖아!”
“근데 저게 유리 선배라고 어떻게 확신해?”
"어... 근데 맞는 것 같아! 저거 맨날 신고 다니던 거잖아!"
“어, 차에 태운다. 어디로 데려가는지 봐!”
“미카엘관 뒤쪽으로 나갔네. 저기로 가면 방위사령부 방향 아냐? 헌병대 본부가 거기잖아!”
“하지만… 저건 ‘끌려갔다’지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근거는 아니잖아.”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맞는 말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고민하던 요한이 말했다.
“하씬느. 근데 거기 물어본다고 이렇다할 대답이 나오겠어?”
“괜히 우리가 들쑤셨다가 더 큰일나는 거 아냐?”
“정보 캐는 건 기자들이나 능숙한 일이잖아. 차라리 어디 제보를 하는 건 어때?”
의견이 분분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당신이 꺼낸 명함을 요한이 바라보고 말을 잇는다.
전화 걸어봐라, 강선중.
당신이 명함 속 번호로 전화를 걸면 학생식당에서 마주쳤던 수습기자가 연락을 받는다.
그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취재를 요청할 수 있다.
...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우린 우리대로 알아보고, 정황이 나오면 공유해 줄게요. 급한 일이 있으면 이 번호든, 앙셰네 지 공식 번호든 연락해요. 위에 보고해 둘 테니까요.”
전화를 끊고 학생들이 저마다 할 일을 하며 상황 정리를 기다리는 동안, 요한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맞아, 인자미나에 글을 쓴 게 유리야. 내가 그걸 도왔고. 설령 그 모든 소문이 거짓이라서 처벌을 받아야 하더라도, 그 결과가 새벽에 남몰래 끌려가 종적을 감추는 형태여야 하나?
삶과 죽음은 한 선으로 가로놓여 있어, 동일한 권리 나누어 받은 시민들이여
.
.
.
그날 밤, 학생회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당신이 앙셰네 지에 한 제보는 상당한 유효타였다.
똘똘 뭉친 기자들이 병원과 군 양쪽에 '빨대를 꽂고' 소식을 물어 왔다.
오전 07시 04분, 유리 모하에의 시신이 하씬느 병원 응급실로 실려 들어왔다.
심폐소생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시신이 구급차에 실릴 때부터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헌병대는 참으로 교묘한 방식을 사용해 유리의 혐의와 라가힛의 죽음을 하나로 묶었다.
노노이 라가힛이 금지 약물 혐의를 썼고, 그 공급책으로 유리 모하에가 지목된 것이다.
수사 과정 중 라가힛과 동일하게 약물을 과용한 유리가 쇼크사했다는 것이 군과 정부의 입장이었다.
공분한 학생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 '평화로운' 나라에서, 고작해야 가끔 강성 노조의 시위 정도나 일어나던 도시에서 갑작스레 불길이 치솟았다.
시위 현장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기술은 재앙의 날을 거치며 실전되었지만, 화염병만 저항의 상징이겠는가?
무기는 많았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누구도 공격하지 않은 채 학생회관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한번 폭력사태를 일으키기 시작하면 상황을 겉잡을 수 없다는 학생회의 판단이 들어맞았다.
4학년 학생들이 학생회관을 겹겹이 둘러 지키고, 아직 전투 역량이 모자란 저학년들은 내부에 모여 앉아 손을 잡고 촛불을 들었다.
당신은, 이때 어디 있었을까?
당신은 어쩌면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곁에 한양운이 있었다.
손을 굳건히 맞잡고 바깥을 바라보면서.
시선은 건물과 옥상을 타고 흘러 모래바람에 실린다.
날아가, 장벽 너머로, 닿고 싶은 곳에.
학생회관 앞에는 오래된 연단이 있었다.
뛰어오른 것은 요한이었다.
그는 떨고 있었다.
두려워서, 무서워서, 긴장되어서가 아니다.
생생하게 살아 지펴진 격노가 그 부르짖음 안에 있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
차마 목이 메어서, 요한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어떤 시였다.
그것도 수첩에 메모한.
그 수첩이 당신 앞으로 툭 떨어진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역사의 기로에서 적극적이거나 방조적이거나 소극적일 수 있다.
당신은 수첩을 들어 요한의 연설을 받아 읽어줄 수도 있고, 그에게 그것을 돌려줄 수도 있다.
다음 구절은 이렇다.
「그러나 우리 노래의 선율이 서글픈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사는 사람은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그 문장이 누군가의 명료한 발음을 타고 터진 순간, 근처 반경에 있던 모든 스마트워치가 새빨갛게 진동하며 경고음을 내보냈다.
금지 문장이 인식되었습니다.
검열된 문장이 인식되었습니다.
음성이 검열되었습니다.
이를 악문 요한이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어 나갔다.
세상에서 삭제된, 기록말살형을 받은, 끝없이 무수한 텍스트를 아십니까?
러시아 땅이 절반쯤 황폐화되었다고 해서 네크라소프의 시까지 사라져야 합니까?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살아가던 우리는 어제 학우 두 사람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마이크가 순서대로 돌았다.
울며 더듬더듬 준비한 말을 읽는 학생도 있었고, 분노하여 주먹을 휘두르는 학생도 있었으나 대체로는 평화로웠다.
그때,
삐이익-----!
지나치게 큰 호루라기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이성 판정
기준치: | 48/24/9 |
굴림: | 2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성치 감소 없음.
“각성자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알린다. 지금 즉시 학생회관 점거를 중단하고 해산하도록 한다. 00시 정각까지 해산하지 않을 시 헌병대는 강경 진압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반복한다, 각성자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알린다…….”
자정까지는 이제 4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새하얘진 얼굴, 벌건 눈동자들이 요한과 학생회 임원들에게 향했다.
“선배는요? 지금 제일 위험한 거 사실 선배예요.”
“1학년, 2학년부터 일단 내보내. 농성을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지 전교생의 절반이 여기 몰려 있을 필요는 없잖아.”
그런 후에 요한은 한양운과 당신의 손을 붙잡고 눈을 불태웠다.
몇 마디 말이 더 오가고, 치솟는 말들을 삼키던 그는 한양운에게 급히 제 수첩을 쥐여 주었다.
한양운은 조금 당황하지만, 이런 걸 가지고 실랑이할 시간이 없다.
우선 당신과 함께 이 장소를 빠져나가야 한다.
자오선을 넘어
.
.
.
두 사람은 아우성치는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겨우 인적 드문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제야 멈춰선 한양운은 급히 수첩을 훑어보고, 생각 끝에 결단을 내린다.
그때
탕!
소리가 들린다.
분명한 총성이었다.
학생회관 방향에서 났다.
저편이 몹시 시끄러워졌다.
사이렌 소리, 확성기 소리가 뒤엉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정을 내린 한양운은 이를 악물고 말한다.
눈시울이 뜨겁다.
목에 뭔가 걸린 것 같아서.
멀리 모래바람 소리, 발밑에 고인 너테파도꽃, 스무 살의 한 갈피에 고인 너.
돌아올게. 그 약속밖에는 할 수 없다.
믿고 의지하던 대상을 놓고 떠나는 것이 생살을 자르는 것보다도 힘들다.
추억이란 두려운 것이다.
꺼내 보고 쓸어 만질 때마다 닳아 없어지니까.
이윽고 그것으로조차 견딜 수 없을 때가 오면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텅 빈 구멍이 남으니까.
하지만 이제 우리는, 멈추지도 망설이지도 말아야 할 순간이 닥쳤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어쩌면 선택할 수 있다.
이게 정말 선택일까?
상황에 내몰려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우리 스무 살에, 죽기보다도 힘든 순간을 고르는 것이 선택이기는 한가?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발뒤꿈치를 잘라 놓고 떠나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진실을 알고자 한 발짝 나아가는 게 대체 의미가 있기는 할까?
그러나 그는 한 발짝을 떼었다.
다시 한 걸음.
돌아보지 않고 걷다가, 뛰었다.
그제야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끔찍한 격통 속에서, 심장을 쥐뜯는 것 같은 성장통 안에서 한양운은 달렸다.
앞으로,
너머로,
자오선을 넘어서…….
어깨를 무언가 두드린다.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다가, 끝내는 소나기로 길어져 키질되는 쌀처럼 땅바닥에 까불렸다.
어떤 빗줄기는 해풍의 구조를 이루는 방파제처럼 윤무의 일부에 이르러 춤을 추었다.
세상의 모든 경로와 진실이, 구현이, 설계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신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이라면 이런 이별은 겪어도 되지 않으리라.
학생회관 쪽에서 울분에 찬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은 한 선으로 가로놓여 있어, 동일한 권리 나누어 받은 시민들이여
여기 화합과 희망의 상징, 위대한 화음이 있으니
이 땅의 더 나은 미래를 우리 자녀들에게로 넘기자…….
변절자들의 나라
.
.
.
4년 뒤, 각성자사관학교.
계절에 맞지 않게 일부러 피워낸 너테파도꽃이 지천을 뒤덮은 오늘은 각성자사관학교의 49기 졸업식이었다.
4년 전의 소요는 학교에 짐승이 할퀴고 간 듯한 총탄 자국 몇 개만 남겼을 뿐이었다.
죽은 사람은 몇 없었다.
그마저도 오발에 의한 사고라고 판단되어 몇 사람이 징계를 받고 군복을 벗었을 뿐이었다.
이 위대한 공화국에 악의적인 사고란 것이 있기나 하겠는가?
도열한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태도로 바로서 연단을 응시했다.
학장의 지루한 축사가 끝나고, 귀빈들의 특별 축사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어떤 발걸음이 계단을 오른다.
4년 전 학생회관에서의 일 이후, 학생들은 두 파로 갈려 서로를 물고 뜯었다.
'순수한 운동'이란 말이 그 시절쯤에는 농담밖에는 되지 않았다.
분기마다 한 번씩은 누군가가 밀고당하여 학교 바깥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체제에 반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변절은 사람을 이토록 지난하게 만든다.
소리 없는 걸음.
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사람이었다.
영혼이 죽은 것 같은 눈이 학생들을 응시한다.
"여기, 사랑했던 동기들을 길러낸 자랑스러운 나라의 요람에 돌아오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살아서 말하리라>
1부, ‘스와콥문트를 동경하는 자들’ 끝.
2부, ‘아무도 너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다’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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